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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우리가 몰랐던 실학자 정약용의 5가지 충격적 진실

by dimecomm 202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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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형제와 천주교,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정약종은 조선 후기 서학과 천주교, 신유박해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형제가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떠나는 과정은 서로 달랐고, 특히 정약용과 정약전의 신앙이 이후에도 지속됐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해석이 엇갈립니다. 이 글에서는 정약용의 세례명 ‘요한’, 정약종의 순교, 1801년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정약용의 배교 문제, 정약전의 흑산도 생활까지 확인 가능한 기록과 후대 전승을 구분해 살펴봅니다.

 

우리가 몰랐던 실학자 정약용의 5가지 충격적 진실
KBS 다큐 리뷰

정약용의 세례명은 정말 ‘요한’이었나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실 가운데 하나가 세례명 ‘요한’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관련 자료에서는 1784년 겨울 이승훈 베드로가 이벽, 권일신, 정약전·정약용 형제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하며, 당시 정약용이 받은 세례명을 ‘요한 사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측 전승: 정약용은 초기 조선 천주교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고 ‘요한 사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인물로 기록됩니다.

그렇다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단정해도 될까?

여기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약용이 이벽·이승훈 등과 교류하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실제 천주교 신자로서 어느 정도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정약용은 그의 형제들과 달리 초기 교회 조직에서 뚜렷한 지도자 역할을 맡지 않았고, 정치적 공격을 받을 때마다 천주교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것과 ‘정약용은 평생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였다’는 주장은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정약종은 왜 형제들과 다른 길을 갔나

정약용 형제 가운데 천주교 신앙과 가장 분명하게 연결되는 인물은 정약종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정약종은 1760년에 태어나 1786년경 형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입교했습니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습니다.

구분 정약종
출생 1760년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교회 역할 명도회 회장
대표 저술 《주교요지》
사망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

한글로 쓴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정약종의 대표적인 업적은 《주교요지》입니다.

《주교요지》는 한자를 읽기 어려운 일반 백성도 천주교 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쓴 책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한글로 저술된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로 설명합니다.

정약종은 주문모 신부로부터 교리 공부와 전교를 담당하는 평신도 조직인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됐고 신앙 전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기존 글에서 정약종이 천주교 이전에 ‘도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단정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신뢰도 높은 기본 사료·공식 인물자료를 확인하기 어려워 최종본에서는 제외했습니다.

 

신유박해는 종교 탄압이었나 정치 숙청이었나

1801년 순조 즉위 초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조선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규모 박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정부는 천주교를 성리학적 국가질서와 제사·가족윤리를 위협하는 사교로 규정했고 전국적으로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박해 과정에서 약 300명이 순교했으며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종, 강완숙 등 초기 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처형됐습니다.

동시에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신유박해는 단순한 종교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정조가 1800년 사망한 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정계의 주도권을 잡은 벽파는 천주교 문제를 이용해 남인 시파와 신서파를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종교·사상적 탄압과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권력투쟁이 결합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정약용 형제가 속한 집안 역시 근기 남인 계열이었기 때문에 천주교 문제와 정치적 당파 문제가 동시에 그들의 운명을 압박했습니다.

신유박해를 단순히 ‘천주교 탄압’이라고만 보거나 반대로 ‘종교를 이용한 정치 숙청일 뿐’이라고만 규정하면 사건의 한쪽 면만 설명하게 됩니다.

정약용은 정말 배교했나

정약용의 천주교 문제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바로 배교입니다.

정약용은 천주교 관련 혐의로 여러 차례 정치적 공격을 받았고, 자신이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밝혔습니다.

특히 1790년대 이후 천주교가 정치적 공격의 핵심 소재로 사용되면서 관료로 활동하던 정약용에게 신앙 문제는 생존뿐 아니라 정치적 경력과 직결되는 문제가 됐습니다.

1801년 결국 강진 유배로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정약용과 정약전도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정약종처럼 순교의 길을 택하지 않았고 살아남았습니다. 정약용은 이후 강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됐습니다.

확인 가능한 핵심: 정약용은 공식적으로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고 신유박해에서 살아남아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내면의 신앙까지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른 신자를 색출하는 방법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는?

기존 글에서는 정약용이 살아남기 위해 노비나 어린아이를 심문해 다른 천주교 신자를 찾아내자는 방법을 직접 제시했다고 단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체적인 발언은 작성자가 인용한 원사료와 문맥을 함께 확인하지 않으면 정약용 개인의 확정된 행동으로 소개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최종본에서는 해당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역사 인물에게 다른 신자의 체포나 박해에 직접 책임이 있었다고 설명하려면 《사학징의》·실록·관련 상소 등 원사료에서 발언의 주체와 문맥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정약전과 정약용의 말년 신앙 논쟁

정약전과 정약용이 박해 이후에도 마음속으로 천주교 신앙을 유지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해석이 갈립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다시 천주교 신앙을 가졌을까?

정약전은 1801년 유배된 뒤 흑산도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섬 주민들과 교류했고, 이 과정에서 《자산어보》를 비롯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후대 천주교 자료에는 흑산도에서 정약전이 신자 박인수의 집에 머물렀으며 한국어 성가 가사를 만들었다는 전승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 뒤 현지 구전을 바탕으로 작성된 선교사 보고에 전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정약전의 말년 신앙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는 하지만,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확실히 천주교 신앙을 회복했다고 입증하는 직접 사료로 보기는 어렵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정약용도 다시 천주교로 돌아왔을까?

정약용에 대해서도 천주교계 기록과 일부 연구에서는 강진 유배 이후 또는 말년에 신앙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반면 정약용 자신이 남긴 《자찬묘지명》과 유학 저술을 근거로 그가 끝까지 유학자로 살아갔다고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

관점 주요 근거
신앙 유지·회복 가능성 후대 천주교회 기록, 다블뤼·달레 등의 교회사 자료
배교 이후 유학자로 정착 정약용 자신의 기록과 유배 이후 방대한 유학 저술

즉 정약용의 말년 신앙을 어느 한쪽으로 확정해서 설명하기보다 교회사 자료와 정약용 자신의 기록 사이에 해석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신중합니다.

정약용 삼형제의 서로 다른 선택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은 모두 서학과 천주교를 접했지만 1801년을 거치며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

인물 천주교와 관계 1801년 이후
정약종 명도회장·《주교요지》 저술 신앙을 지키다 참수, 후일 복자
정약전 초기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기록 흑산도 유배, 《자산어보》 저술
정약용 세례명 요한 전승, 실제 신앙 활동 범위는 논쟁 강진 유배, 실학 사상 집대성

정약종은 종교적 신념을 끝까지 지켰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살아남아 유배지에서 학문과 저술을 이어갔습니다.

어느 선택이 더 숭고했는지를 단순히 판단하기보다는, 당시 천주교 신앙이 개인의 종교적 선택을 넘어 가족·관직·정치적 생존·국가질서와 직접 충돌하던 문제였다는 시대적 상황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 핵심 정리

  1. 천주교 측 자료에는 정약용이 1784년 세례를 받고 ‘요한 사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2. 다만 정약용이 어느 정도로 천주교 신앙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해석이 엇갈립니다.
  3. 정약종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로 명도회장을 맡고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했습니다.
  4.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순교했습니다.
  5.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과 벽파·남인 사이 정치투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입니다.
  6. 정약용과 정약전은 박해 이후 살아남아 각각 강진과 흑산도에서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7.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신앙을 회복했다는 후대 기록이 있지만 이를 확정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8. 정약용의 말년 천주교 신앙 회복 여부 역시 교회사 기록과 본인의 저술 사이에서 해석이 갈립니다.

정약용 형제의 삶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누가 신앙을 지켰고 누가 버렸는가라는 단순한 구분만이 아닙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조선에서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개인의 신념을 넘어 가족과 정치적 생존까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삶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정약종은 신앙을 지키며 순교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살아남아 다른 방식으로 조선 후기 지식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선택을 함께 볼 때 신유박해라는 사건과 정약용의 삶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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