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조선 천주교의 5가지 놀라운 진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세계 유일의 자생적 신앙공동체 이야기
📚 목차
서론: 모든 시작은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낯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서양 선교사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놀라운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한국 천주교가 선교사 한 명 없이, 조선의 젊은 학자들 스스로의 지적 탐구에서 시작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우리를 18세기 조선의 한겨울, 눈 덮인 암자로 이끌어갑니다. 지금부터 조선 천주교의 자생적 탄생 과정과 그 중심에 있었던 천재 학자 '이벽'을 중심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5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짚어보겠습니다.
1. 최초의 신앙 공동체는 '학술 세미나'에서 시작되었다
1779년 겨울, 경기도 천진암(天眞庵)의 주어사라는 암자에 당대의 젊은 남인 계열 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정약용 형제를 비롯한 이들의 목적은 존경받는 학자 권철신(權哲身)의 주도 아래 유교 경전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강학(講學)', 즉 오늘날의 '학술 세미나'였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도착한 한 사람으로 인해 이 모임의 성격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바로 광암(曠庵) 이벽(李蘗)이었습니다. 그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산을 넘고, 심지어 호랑이가 가로막는 길을 헤쳐가며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주도로 토론은 기존 유교 사상의 틀을 넘어섰고, 하늘과 세상, 그리고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롭고 낯선 사상, 즉 '천주교'에 대한 논의가 밤이 새도록 이어졌습니다.
2. 선교사가 아닌 '유학자'가 복음을 전파했다
조선 천주교의 문을 연 이벽은 단순히 서양 학문에 호기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산 정약용조차 한 수 위로 인정할 만큼 뛰어난 유학자였습니다. 다산은 자신의 역작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서문에서 이 책을 이벽의 도움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히며, "만일 광암 이벽이 살아있다면 그의 학식과 덕이 어찌 내게 뒤지겠느냐"고 적었습니다.
천진암의 지적 불꽃이 타오른 후, 이벽은 수년간의 깊은 탐구를 거쳐 마침내 조선 최고의 지성들을 설득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섭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전파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지성을 걸고 벌이는, 목숨을 건 사상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건네며 천지 조화와 영혼의 이치를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이어 당대 최고의 천재로 꼽히던 이가환(李家煥)과 3일간의 불꽃 튀는 공개 토론을 벌여 마침내 승리하며 그의 지적 권위를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가장 어려운 관문에 도전합니다. 자신의 스승이자 천진암 강학을 이끌었던 노감 권철신을 찾아가 열흘에 걸친 끈질긴 설득 끝에 입교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의 영향력은 조선 지식 사회의 심장부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3. '유교의 완성'이라는 논리가 천주교 수용의 열쇠였다
성리학이 절대 규범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유학자들이 어떻게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 지적인 열쇠는 16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에 있었습니다.
이 책은 천주교가 유교와 대립하는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완성시켜준다는 '보이론(補儒論)'이라는 혁신적인 관점에서 쓰였습니다.
특히 서양의 '천주(天主)'가 유교 경전에 등장하는 절대자 '상제(上帝)'와 같은 개념이라는 논리는, 닫혀 있던 조선 유학자들의 마음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서학이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궁극적인 완성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입니다.
이벽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학풍을 이은 학자로서, 주자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서는 '탈주자학적' 성향을 지녔습니다. 이미 기존의 학문 너머를 갈망하던 그에게 '보이론'은 유교의 연장선상에서 서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완벽한 지적 토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4. 세계 유일의 '자생적' 천주교회, 교황도 인정했다
훗날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주교가 가장 놀랐던 사실은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파시킨 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 천주교만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학문적 탐구만으로는 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이벽은 1783년, 절호의 기회를 포착합니다. 정약용의 자형인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동지사(冬至使)라는 공식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입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서 직접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더 많은 교리서를 가져와 달라는 중대한 부탁을 합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고, 돌아와 이벽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마침내 이 땅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는 외부의 힘이 아닌, 조선 사회 내부의 열망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였습니다. 그 열망의 근원에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유교적 신분 질서가 지닌 한계와 모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갈망과 '서학'이 제시하는 인간 평등이라는 새로운 비전에 대한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5. 그의 죽음은 '순교'인가, '배교'인가? 끝나지 않은 논쟁
1785년, 명례방(현 명동)에서 열린 신앙 집회가 형조에 발각되면서 조선 최초의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 즉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시작됩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는 '임금과 아비도 모르는 금수의 학문'으로 낙인찍힙니다.
이벽은 가문과 아버지의 극심한 압박 속에서 '신앙'과 '효(孝)'라는 풀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문중 어른들에게 불려가 수모를 당하고 족보에서 파이겠다는 협박을 받은 아버지는, 아들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선언합니다.
가문의 존폐와 아버지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그는 차마 아버지를 저버리지 못하고 "나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며 집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서른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은 첨예하게 엇갈립니다:
배교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근거하여, 이벽이 아버지를 따르기 위해 신앙을 버렸고(배교), 이후 양심의 가책으로 시름시름 앓다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는 견해입니다. 이 때문에 이벽은 순교자 명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순교/독살설: 현대의 연구는 이 기록에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첫째, 당시 경기도 일대에 페스트가 돌았다는 조정의 공식 기록이 전무합니다. 둘째, 가문의 족보 어디에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가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1979년 묘를 이장할 때 발굴된 시신의 치아가 검게 변색된 것을 본 한 해부학 교수가 '독살'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는 그의 마지막 행적입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배교했다면 자유롭게 문밖출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죽을 때까지 집안에 갇혀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강력한 반증으로 해석됩니다.
결론: 닫힌 시대를 열고자 했던 뜨거운 열정
이벽과 초창기 신앙 공동체의 활동은 불과 1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적 열정과 새로운 비전을 향한 꿈은 훗날 거대한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한국 천주교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고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닫힌 시대를 자신의 힘으로 열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역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당신이 이벽의 자리에 서 있다면, 가문의 존폐와 아버지의 목숨, 그리고 영혼의 구원 사이에서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의 꺼지지 않은 열정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