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라는 거대한 빈 공간을 마주할 때, 우리는 흔히 미지의 행성이나 화려한 외계 문명을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짜 경이로움은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그 '비어 있는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 시작됩니다. 넷플릭스의 '로스트 인 스페이스'는 1965년 고전 시리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단순한 우주 미아들의 생존기를 넘어 인간 본성과 관계의 심연을 파고드는 인류학적 고찰을 선사합니다.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공동체가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체되고 다시 결속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회색지대를 날카롭게 조명합니다. 단순한 SF 리메이크를 넘어, 이 시리즈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적인 메시지와 서사적 변곡점들을 전문 비평가의 시선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목차

1. '크리스마스 스타'의 추악한 진실: 환경 파괴와 은폐된 외계의 존재
로빈슨 가족이 정든 지구를 떠나야만 했던 이면에는 인류의 오만과 기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44년 발생한 '크리스마스 스타' 사건은 당국이 발표한 혜성 충돌이 아니라, 사실 외계 함선의 추락이었습니다. 정부는 대중의 공포를 막기 위해 외계 지성체의 존재를 은폐했으나,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추락 여파로 대기는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햇빛이 차단되어 식물의 광합성이 불가능해진 지구에서 인류는 마스크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인 초광속(FTL) 엔진이 사실 외계 기술을 '약탈'한 결과물이라는 도덕적 딜레마입니다. 특히 모린 로빈슨이 아들 윌의 미달된 시험 성적을 조작하기 위해 정부의 비밀 데이터 파일을 교환하는 선택을 한 것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윤리적 가치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SF 설정을 넘어 현실 세계의 기후 위기와 정보 은폐, 그리고 특권층의 생존 우선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메타포입니다. 알파 센타우리로 떠날 수 있는 자격은 능력이 아닌 권력과 연줄에 의해 결정되며, 모린조차 이 부패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야만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시청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2. 로봇과의 교감: 살인 병기에서 수호자로의 전율 돋는 변화
이 시리즈의 가장 강렬한 서사적 장치는 단연 '로봇'과의 유대입니다. 본래 이 로봇은 '레졸루트'호를 공격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던 외계의 병기였습니다. 하지만 윌 로빈슨과의 만남은 이 기계적인 존재에게 유례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마그네슘 동굴 인근에서 추락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 죽어가던 로봇은, 산불이 번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윌의 도움으로 재결합에 성공합니다.
로봇은 자신의 동료였던 다른 외계 로봇들의 공격으로부터 윌을 지키기 위해 창조주의 명령에 저항합니다. 특히 시즌 1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두 번째 로봇이 윌을 공격하려 할 때, 윌의 로봇이 동족을 밀어내고 윌의 손상된 우주복을 수리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핵심 테마를 압축합니다. 이는 단순한 기계적 오류가 아니라, 타자와의 교감이 존재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서사적 장치입니다.
더욱 심오한 것은 윌이 로봇에게 "절대 생명체를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생명체를 막기 위해 그 명령을 철회해야 했던 도덕적 딜레마입니다. 폭력의 사용을 허락한 순간, 윌은 자신이 로봇의 구원자인 동시에 살인 병기를 재가동시킨 장본인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게 됩니다.
3. 악역의 재정의: '닥터 스미스'라는 가면을 쓴 범죄자 준 해리스
'로스트 인 스페이스'에서 가장 위험한 변수는 외계 생명체가 아닌 인간의 이기심입니다. 닥터 스미스라는 가명을 쓰는 준 해리스는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 타인의 신분을 도용해 레졸루트호에 숨어든 범죄자입니다. 그녀는 전형적인 악당처럼 파괴를 일삼지 않습니다. 대신 '살기 위해 타인의 친절과 심리를 무기'로 사용하며 로빈슨 가족의 가장 강력한 자산인 '신뢰'를 잠식합니다.
- 심리적 가스라이팅: 슬픔에 잠긴 안젤라를 조종해 로봇을 향한 복수심을 부추기거나, 지도자 빅터 다르의 권력욕을 이용해 공동체의 균열을 만듭니다. 그녀는 로봇이 레졸루트호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이용해 공동체의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안젤라에게 윌이 숨겨둔 무기를 찾아주어 로봇을 공격하게 만듭니다.
- 교묘한 생존 전략: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인 척 위장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칩니다. 돈 웨스트와 안젤라를 버리고 플레어 건을 훔쳐 달아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신뢰의 시험대: 그녀의 존재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타인의 호의를 어떻게 착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모린을 납치하여 로봇을 부활시키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 하푼을 발사해 존을 구하는 등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보입니다.
파커 포시의 섬세한 연기는 준 해리스를 단순한 악당이 아닌 생존 본능에 지배당하는 비극적 인물로 승화시킵니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 로빈슨 가족을 돕는 이유가 진정한 개과천선인지, 아니면 또 다른 생존 전략인지 모호하게 남겨두는 서사적 선택은 인간 본성의 복잡함을 보여줍니다.

4.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발견: 진정한 탐험의 의미
시즌 2의 첫 에피소드인 'Shipwrecked'의 오프닝에서 윌 로빈슨이 누나 페니의 글을 낭독하는 장면은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철학적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외계 행성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과 가족의 진정한 면모를 발견하는 거울과 같은 장소입니다.
- 윌 로빈슨, 페니 로빈슨의 글을 읽으며
이 인용구는 물리적인 공간의 탐험을 넘어, 서로를 다 안다고 자부했던 가족 구성원들이 위기 속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서로의 용기, 결함, 그리고 깊은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주디가 얼음 속에 갇혀 질식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윌은 아버지를 돕기 위해 혼자 마그네슘 동굴에 남는 용기를 보였고, 페니는 PTSD로 고통받는 주디를 대신해 혼자 샤리엇을 몰고 부모를 구하러 갑니다. 모린은 남편 존과의 오랜 갈등을 극복하고 팀워크를 발휘하며, 존은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회복합니다.
비어 있는 공간(Space)은 곧 인간의 내면을 상징하며, 그 안에서 무엇을 찾아내느냐가 생존의 향방을 결정합니다. 외계 행성의 척박함은 가족 관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균열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접착제가 '서로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임을 증명합니다.
5. 기술의 역설: 외계 FTL 엔진이 불러온 새로운 미궁
인류의 구원이라 믿었던 외계 기술(FTL)은 역설적으로 로빈슨 가족을 더 깊은 미지의 어둠 속으로 내몹니다. 이 엔진은 인류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외계 지성체가 반드시 '되찾으러 오는 물건'이었으며, 이는 결국 인류를 향한 외계 군단의 침공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됩니다.
레졸루트호가 공격받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인류가 훔친 FTL 드라이브를 회수하기 위한 외계 로봇들의 계획된 공격이었습니다. 인류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외계 기술을 가져왔지만, 그 기술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로봇의 FTL 드라이브가 함선의 네비게이션과 결합하며 열린 포탈은 그들을 약속의 땅 알파 센타우리가 아닌, 로봇이 일찍이 "위험(Danger)"이라고 경고했던 미지의 '이중성계(Binary Star System)'로 인도합니다. 시즌 1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이 로봇의 그림을 떠올리며 "이곳은 위험해(This place is dangerous)"라고 깨닫는 순간은 소름 돋는 반전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인공지능, 유전자 편집, 핵에너지 등 강력한 기술을 통제 없이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우화적으로 경고합니다. 인류는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기술이 불러올 결과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결론: 우주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넷플릭스의 '로스트 인 스페이스'는 화려한 CG 뒤에 '신뢰'와 '유대'라는 묵직한 테마를 숨겨둔 수작입니다. 우주는 거대한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그 비어 있는 공간을 응시할 때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장 순수한 본모습입니다. 인류의 오만함이 불러온 재앙 속에서도 로빈슨 가족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기술의 진보보다 더 중요한 생존의 열쇠가 무엇인지 웅변합니다.
이 드라마는 외계 행성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인간의 이기심(닥터 스미스)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로봇)조차도 사랑과 교감 앞에서는 무력해진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크리스마스 스타 사건이 상징하는 정보 은폐와 특권층의 생존 우선주의, FTL 기술이 불러온 예측 불가능한 결과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반영합니다.
3시즌에 걸친 여정은 단순한 귀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극한의 시험을 통과하며 진정한 결속을 이루는지에 대한 장대한 서사입니다. 제작진이 처음부터 3부작으로 구상한 이 드라마는 산만하지 않은 집중된 스토리텔링으로 시청자들에게 완결된 감동을 선사합니다.
만약 당신이 아무도 없는 우주에 고립된다면, 당신은 곁에 있는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수호 로봇과 어떤 닥터 스미스가 공존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