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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위대한 실학자, 그리고 사도 요한
'다산 정약용'.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자,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를 《목민심서》를 쓴 위대한 학자, 수원 화성을 설계한 천재적인 과학자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이름, '요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위대한 학자 정약용은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의 삶은 두 형제 정약전, 정약종과 함께 신앙과 박해, 그리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선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던, 정약용 삼형제가 걸었던 신념과 정치, 그리고 가슴 아픈 선택의 길을 따라가며 다섯 가지 충격적인 진실을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진실 1: '다산 정약용'은 세례명이 '요한'이었던 열성 신자였다
흔히 정약용이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의 대상으로만 탐구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넘어선 적극적인 신자였습니다.
정약용은 매형인 이승훈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으며, 1846년 조선에 온 한 프랑스 신부가 남긴 기록(《W록》)에도 그는 '요한(John)'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충실한 신자였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처음 정약용이 천주교를 접한 것은 기존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새로운 신앙'이자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에게 천주교는 낡은 시대의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진리이자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노론과 달리 새로운 학문에 개방적이었던 남인 학자들의 지적 갈증과 맞닿아 있었으며, 그에게 천주교는 낡은 시대의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대안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진실 2: 가장 독실했던 동생 정약종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먼저 빠져있었다
정약용과 정약전이 유학자의 관점에서 서학을 탐구했던 것과 달리, 셋째 정약종의 출발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는 형들이 유학에 매료되어 있을 때, 《노자 도덕경》을 읽으며 도교 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존 유학을 보완하려 했던 형들과 달리, 정약종은 이미 유학 이념의 대안을 찾고 있었기에 천주교를 기존 체제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젊은 시절 방황 끝에 신앙에 귀의한 성인의 이름을 딴 '아우구스티노(Augustine)'였습니다. 그는 천주교 비밀 조직인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을 맡았고, 특히 일반 백성들을 위해 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집필하며 신앙 전파에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순수하고 뜨거웠던 신앙은, 곧 닥쳐올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폭풍의 중심이 되고 맙니다.
진실 3: 천주교 박해는 종교 탄압을 넘어선 '정치 숙청'이었다
1801년, 조선 천주교 역사상 가장 잔혹한 탄압으로 기록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됩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단순히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종교 탄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막후에서는 종교의 탈을 쓴 서슬 퍼런 정치 보복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유박해는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老論) 벽파가 정적인 남인(南人)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무기로 삼은 '정적 숙청'이었습니다. 정약용 삼형제는 바로 이 남인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신유박해를 '무고한 천주교인들을 학살한 인간 도살리즘'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는 잔혹한 정치 보복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신념의 문제 이전에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게 된 것입니다.
진실 4: 살기 위해, 정약용은 다른 신자를 색출할 방법을 제안했다
잔혹한 '정치 숙청'의 칼날이 삼형제의 목숨을 위협하자, 생존을 위한 처절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스스로 관아에 잡혀 온 동생 정약종의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동생이 순교의 길을 택하리라 직감하고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를 잠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충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배교를 증명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숨어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할 방법을 관아에 스스로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학자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이 행동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한 인간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생존을 갈망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는 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이자, 우리가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진실 5: 신을 버린 형제들은 어쩌면 끝까지 신앙을 지켰을지 모른다
배교를 통해 살아남은 정약용과 정약전은 정말로 신을 버렸을까요?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해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은 양반의 허식을 버리고 섬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자산어보》를 저술했습니다. 그런데 한 프랑스 선교사가 남긴 편지에는, 그가 흑산도에서 박인수라는 신자의 집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조선어 성가 가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정약용의 경우는 더욱 복잡합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방대한 유학 저술을 남기며 '뼛속까지 유학자'로 생을 마감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공식 역사서인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 그가 과거의 배교를 뉘우치며 여생을 묵상으로 보냈다는 기록
- 새로 입교한 신자들을 위한 책을 썼다는 증언
-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훗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
-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이 비밀리에 중국을 오가며 서학 책을 전해주어 정약용이 천주교인들과 교류를 지속했다는 강력한 증거
두 형제가 공식적으로는 신앙을 버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끝까지 신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미스터리는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있습니다.
결론: 다른 선택, 그러나 같았던 꿈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정약용과 정약전은 나주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뒤, 날이 밝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흩어져야 했습니다. 이처럼 형제들은 비극 속에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 정약종은 끝까지 신을 택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 정약용은 임금을 택하고 학문을 통해 살아남아 시대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 정약전은 백성을 택하고 유배지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조용한 기여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 현실 정치, 인간. 이들의 선택은 언뜻 달라 보이지만, 어쩌면 그들이 가고자 했던 길의 목표는 모두 '인간의 구원'이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초들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꿈은 방법만 달랐을 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00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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